김동철 (18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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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김동철

김동철(金東轍,1893년 ~ 1968년 1월 7일)은 일제강점기의 체육인이자 축구인이다.

조선체육회 창립준비위원 및 임원, 조선축구심판협회 창립위원, 조선축구협회 창립준비위원 및 이사, 경기도지부장 및 경성실업축구연맹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생애[편집]

1893년 (고종 30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마산공립보통학교(현 마산성호초등학교)를 거쳐 선린상업고등학교(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당시 경제부 기자로 입사하였으며, 이후 조선체육회 발기인으로 참가 및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한데 이어 조선체육회가 창설되자 상무이사, 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1] 조선체육회 시절부터 조선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심판을 역임하였으며, 1928년에는 조선축구심판협회 발기위원으로 참가하였다. 이후 조선축구협회에서도 상무이사 및 전문대학학생연맹고문 등을 역임하였다.[2] 1939년에는 조선축구협회 중앙지부가 경기도 지부로 개편되면서 초대 경기도 지부장이 되었으며, 그해 결성된 경성실업축구연맹의 이사장이 되었다.

그 밖에도 조선정구협회, 조선농구협회, 조선씨름협회, 궁도협회, 여자진흥회 등 각종 체육단체의 고문 및 이사를 역임하는 등 일제 식민지 시기 한국체육 발전을 위하여 분야를 가리지않고 노력하였다. 해방 이후 1949년 대한운수협회[3]에 상무로 재직하였는데, 이 단체에 일할 때에는 축구협회 일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4] 한국전쟁 이후로도 꾸준히 체육관련 활동을 전개하던 김동철 씨는 1967년에는 대한체육회 창립 47주년 기념식에서 기념패를 수여받기도 하였으며 이듬해인 1968년 1월 7일 노환으로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향년 75세.


에피소드[편집]

  • 1929년 신년을 맞아 동아일보가 조선체육계 10년을 회고한 기사를 보면, 김동철 씨는 몰기로 유명하다 하였다. [5]
  • 휘문의숙의 코치로 있을 당시, 배재학당과의 라이벌전에서 휘문의숙이 3년 연속으로 연거푸 지자, 김동철 자신이 수염난 3학년 만학생으로 신분을 속이고 교모를 쓰고 경기에 출전했다가 발각되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외부 링크[편집]


참고 서적[편집]

  • 대한체육회50년사(대한체육회, 1970)


각주[편집]

  1. 기자 출신이어서 그런지 주로 선전, 조사, 연구 부분을 담당하였다.
  2. 조선축구심판협회 창단 즈음하여, 직장을 동아일보에서 철도국 서무과로 옮기게 되는데 그 때부터 철도국 내에서 축구대회가 개최되거나 오사카아사히신문 경성지국 주최의 전조선축구대회에 철도국 축구팀의 참가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 김동철 씨가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3. 일제강점기 철도국의 외곽단체인 철도협회의 후신이다.
  4. 아이러니하게도 철도협회의 회장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인 신익희 씨였다.
  5. 한말전후의 조선체육계 심년이전을 회고 1편 -1929년 1월 1일,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