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아이파크의 역사

풋케위키, 대한민국 대표 축구위키 FootballK WIKI-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참고로, 위키피디아의 부산 아이파크 문서의 역사 부분과 아래 부분의 내용이 동일한데, 이는 작성자가 동일인이기 때문입니다. ^^

1. 프로축구 이전[편집]


1979년 11월 22일 실업 축구단으로 창단된 새한자동차 축구단을 부산 아이파크의 전신이자 모태로 봄이 상당하다고 본다.[1] 1979년 창단 후 1980년 10월경 시즌중에 대우축구단으로 명칭변경 이후 1981년 제29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실업축구팀에 머물던 새한자동차 축구단이 프로화를 논의하게된 계기에는 한국프로축구 탄생을 위한 움직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1980년 12월 20일 한국 최초의 프로축구단인 할렐루야 축구단이 창단되었고 꼭 1년여 뒤인 1981년 12월 17일 2번째 프로축구단 유공 코끼리가 창단 됨에 따라 기존에 실업 축구단을 운영 중이던 현대를 비롯해 대우에도 프로화가 권유된다.

2. 대우 로얄즈 창단[편집]


1983년 원년에는 대우그룹을 모기업으로 유지하면서 실업축구단으로 수퍼 리그에 참여했으며 1983년에 우승팀인 할렐루야 축구단에 이어 리그 2위를 기록하였고 그 해 최다 관중을 동원한 팀으로 기록되었다(16경기, 34만 7895명). 당시 대우그룹은 매 홈경기때마다 자사의 자동차, VTR, 냉장고, 세탁기등을 경품으로 내놓는 파격적인 이미지 마케팅 전략을 선보이며 당대에 회자가 되었고 덕분에 대우 홈경기는 연일 만원 행진을 벌였다.

1983년 12월 3일 국내 프로 축구단 제 3호로 재창단 하면서 클럽 공식 명칭을 대우 로얄즈로 변경하고 1984년 수퍼 리그에 참가했다. 보통은 모기업의 이름인 대우라고 불렸고 그 해 1984년 8승 4무 2패 승점 29점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1984시즌 MVP 박창선, 감투상 정용환, 지도상 장운수 이상, 대우 로얄즈)

3. 아시아 제패[편집]


1985-86시즌, 1972년 이후 약 13년 동안 중단되었던 제 5회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AFC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이 재개되었는데 이 대회에 대우 로얄즈가 출전, 결승전에서 알 알리를 3:1로 꺾고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클럽팀이 아시아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하게 된다. 종전 기록은 69년 제 2회 AFC 챔피언스 컵에서 중앙정보부 산하의 양지 축구단이 준우승한 기록이 전부였던 것이기에 더욱 의미가 컸다.

게다가 이듬해인 1986년 2월에는 아프로 아시아 클럽챔피언쉽에 AFC 챔피언스 컵 우승팀 자격으로 출전, 아프리카의 레자 카사블랑카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아프리카-아시아를 통틀어 최초로 최강의 축구 클럽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같은해 대우 로얄즈는 16승 14무 2패를 기록하여 K-리그 2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리는데까지 성공하며 최전성기를 누렸다.

(87시즌 MVP 정해원, 신인왕 김주성, 지도상 이차만, 모범상 박노봉 이상 대우 로얄즈)

4. 외국인 감독 시대[편집]


1988년에는 88 서울 올림픽 축구대표로 주전 선수들이 대거 차출되면서 최하위를 기록하였고 이듬해인 1989 시즌에도 3위에 머물자 이차만 감독이 경질되고 90시즌 동독 출신의 프랑크 엥겔감독을 대우 로얄즈의 사령탑에 앉혀 K리그 최초의 외국인 감독 영입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엥겔 감독은 동독권에서는 상당히 쳐주는 명장에 속한다. 고국에서는 92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 총감독이었던 데트마르 크라머 이상으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런 인물을 데려온 대우의 인맥의 깊이를 가늠케하는 대목이다.

1991년 프랑크 엥겔에 이은 2번째 외국인 감독으로 헝가리대표 출신의 비츠케이 감독을 사령탑에 앉힌 끝에 17승 18무 5패로 K리그 3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리는데 성공했다. 91시즌 세운 K리그 최초 21경기 연속 무패 기록도 신기록이었다.

(91시즌 MVP, 모범상 정용환, 수비상 박현용, 지도상 비츠케이 이상 대우 로얄즈)

5. 시련기[편집]


91시즌 우승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우로얄즈는 순식간에 암흑기를 맞이한다. 92시즌부터 96시즌까지 5년동안, 로얄즈의 순위는 최하위권을 맴돌았고, 관중수도 격감했다. 감독은 총 4번을 바뀌면서 혼란을 거듭했던 시기다. 우승 이후의 갑작스런 몰락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83 초대 시즌부터 로얄즈의 황금 멤버를 이루었던 이태호, 정해원, 조광래, 변병주, 정용환 등이 90년대에 들어오면서 하나 둘 은퇴했음에도 이들을 대체할 신인을 육성하는데 실패한데에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

87시즌부터 시행되었던 K-리그 드래프트에서 대우로얄즈는 조덕제, 심봉섭, 노경환, 김경래 등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차례로 지명했음에도 그들에게 출전기회를 턱없이 적게 부여하거나, 또는 육성하려고 해도 신인선수 대부분이 부상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기존의 황금 멤버진의 저력을 메우는데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김주성 선수의 독일 진출, 김판근선수의 LG 치타스 이적, 김풍주의 부상 등, 그나마 황금 세대 중, 젊은 축에 속했던 선수들마저, 모두 부상으로 시즌을 소화할 수 없게되면서, 베스트 11중 7~8명이 정상이 아닌 최악의 상황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1992년 드래프트에서 로얄즈가 지명한 신태용, 이태홍을 내주고 일화가 지명한 당대 최고의 유망주 김정혁을 데려오는 승부수를 던졌으나, 김정혁은 부상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는데 실패하였고, 오히려 신태용 이태홍 두 선수가 일화에서 대활약, 일화의 리그 3연패를 이끄는 주인공이 되버렸으니, 로얄즈의 암담함은 극에 달했다.

이 암흑기는 95년 김주성의 복귀 이후에야 겨우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2년뒤, 부산대우로얄즈의 (96년부터 팀명 부산 대우 로얄즈로 변경) 황금기를 열어젖히게 된다.

6. 부산 연고 정착과 전성기 도래[편집]


1995년에 K-리그에 연고지 정착제가 도입되자 대우는 부산 대우 로얄즈로 바꾸고 연고지를 부산으로 정했다. 1997년에 정규리그는 물론이요 컵대회인 아디다스컵과 프로스펙스컵 우승을 거머쥐게 되면서 1997시즌 프로연맹 주관 모든 대회를 완전석권하는 천하통일을 이루는 전관왕 대업을 달성하게 된다. 동시에 프로축구 K-리그 최초의 리그 4회 우승의 업적도 달성하게 된다.

(97시즌 MVP, BEST 11 DF-김주성, BEST 11 GK-신범철, MF-정재권, FW-마니치, 지도상 이차만 이상 부산 대우 로얄즈)

7. 대우 로얄즈의 종말과 부산 아이콘스 출범[편집]


8. 부산 아이파크로의 팀 명칭 변경과 오늘에 이르기까지[편집]


참고 사항[편집]

  1. 포항 스틸러스도 창단 시점을 포항제철이 실업축구단을 창단했던 1973년으로 잡고 있다.

함께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