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헬싱키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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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헬싱키 올림픽.jpg
헬싱키 올림픽 엠블럼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이란, 1952년 7월 19일부터 동년 8월 3일까지 개최된 올림픽을 말한다.

축구위키인 풋케위키에서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이란, 올림픽 축구에 한정하여 다룬다.


진행 과정과 결과[편집]

총 25개 국가가 참가하였으며 예선전은 개최국인 핀란드를 비롯해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단판으로 치러 승자가 16강으로 바로 직행하는 토너먼트 형식을 취했다.[1]특히 헬싱키 올림픽은 셰베시 구스타프 감독이 이끄는 매직 마자르가 본격적으로 세계 축구계를 뒤집어놓은 대회로도 잘 알려져있다.


최종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득점왕 : 브랑코 체베치[2] (유고) - 7골


한국의 참가[편집]

대표팀 선발과 최종 명단[편집]


헬싱키 올림픽 개최를 앞둔 1952년 당시 한국은 전쟁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올림픽 출전을 위한 축구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한국의 올림픽 참가가 확정되었으며, 1952년 3월 15일부터 17일까지 서울운동장에서 헬싱키 올림픽 출전 선수 선발전이 진행되었다. 최종적으로 1952년 3월 18일 헬싱키 올림픽대표 참가 명단은 아래와 같았다.


포지션 이름 당시 소속팀
감독 김화집 KFA
코치 겸 주무 이용일
GK 전성원 육군
홍덕영 조선방직
FB 박규정 육군
박대종 조선방직
이철
HB 민병대 육군
주영광 해군
FW 김용식 육군
정남식 조선방직
정국진 해군
최영근


위에 보다시피 선수단은 필드 플레이어 10명에 골키퍼 2명, 총 12명의 초미니 규모로 결정되었다. 당시 한국의 외화 수급이 쉽지 않았던 상황에서 올림픽 참가를 위해 대규모 인원을 파견하기 어려운 점이 많이 작용했으리라. 하지만 이 선수단은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한채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아래 참조.


대회 출전 좌절[편집]


이렇게 선수단과 스탭진 모두 합쳐 14명인 초미니 선수단을 꾸렸으나, 이는 다른 구기 종목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원수가 많이 필요한 구기 종목들은 올림픽 참가를 자진 포기하라는 윗선의 권유(?)가 내려왔고, 결국 최후에는 농구 대표팀과 축구 대표팀 중 하나가 올림픽에 나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문제는 '누굴 내보내야되느냐'였는데 여기서 갑론을박이 오갔으나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급기야 이 문제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씨에게까지 올라갔다. 당시 해외 출국이나 외화 사용은 국가의 중차대한 문제라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했기 때문.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명쾌한(?) 해결책을 내렸는데 이는 한국축구백년사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옮겨적는다.


당시 대한체육회에서는 축구냐? 농구냐?를 놓고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지자 그 문제를 직접 대통령에게 들고 올라갔었다. 이 때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李 대통령은 최종 재가를 내려달라는 문교부, 체육회 관계자들을 놓고 불쑥 그러면 테니스를 보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각하, 테니스는 올림픽 종목에 포함돼 있지도 않습니다.[3]


그러나 李 대통령의 말은 여전했다.


글쎄, 테니스를 보내라니까


그 때 비로소 사람들은 李 대통령의 뜻을 깨달았다. 올림픽 종목에 포함돼 있지도 않은 테니스를 출전시키라는 말은 축구, 농구 모두 보내지 말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결국, 헬싱키 올림픽은 개인종목 선수 21명과 임원 14명 등 35명의 초미니 선수단으로 꾸려지게 되었고, 구기종목은 모두 불참하였다.


결과 요약[편집]


  • 국내 사정으로 불참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이 대회 예선전에서, 축구 종가를 자처하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무려 룩셈부르크 축구 국가대표팀에 5:3으로 패배한바 있다. 잉글랜드 축구의 흑역사이자 룩셈부르크 축구의 가장 빛나는 순간.
  2. Branko Zebec
  3. 테니스 종목은 1988년 서울대회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