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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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한국으로 귀화한 골키퍼에 관한 것입니다. 마라도나의 핸드볼 사건에 대해서는 신의 손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안양 시절 사리체프

신의손(申宜孫, 1960년 1월 12일 ~ )은 타지키스탄계 대한민국 축구 선수로, 원래 이름은 발레리 사리체프(러시아어: Валерий Сарычев, 영어: Valeri Sarychev)이다. K리그일화 천마, 천안 일화 천마 성남 일화 천마, 안양 LG 치타스, FC GS에서 활약한 골키퍼이다. 한때 K리그 역대 최고 외국인 골키퍼라고 불리었으며 외국인 골키퍼 보유금지 규정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프로필

  • 이름 : Valeri Sarychev
  • 등록명 : 사리체프 -> 신의손
  • 출생일 : 1960년 1월 12일
  • 신체 : 192cm / 87kg
  • 국가 : 타지키스탄 타지키스탄, 대한민국 대한민국
  • 국가대표 경력
타지키스탄 축구 국가대표
A매치 1경기 출장 4실점
  • 수상 경력
1992 ~ 1995 4회 연속 K리그 시즌 베스트 11 골키퍼 부문
2001년 K리그 시즌 베스트 11 골키퍼 부문 수상
K리그 최초의 한국 국적 귀화선수
K리그 연속경기 무실점 기록 (8경기)
K리그 통산 무실점 경기 4위 (116경기 무실점, 1위는 김병지)
K리그 최고령 출전 기록 보유자 (44세 7개월 17일)
K리그 역사상 유이한 4연속 시즌 베스트 11 선정[1]


  • K리그 기록
소속팀 연도 출장 교체 실점 득점 경고 퇴장
일화 천마 1992 40 0 31 0 1 0
일화 천마 1993 35 0 33 0 0 0
일화 천마 1994 36 0 33 0 0 0
일화 천마 1995 34 0 27 0 3 0
천안 일화 천마 1996 27 0 51 0 0 0
천안 일화 천마 1997 16 2 27 0 0 0
천안 일화 천마 1998 5 0 16 0 0 0
안양 LG 치타스 2000 32 1 35 0 1 0
안양 LG 치타스 2001 35 0 29 0 0 0
안양 LG 치타스 2002 35 0 36 0 1 0
안양 LG 치타스 2003 18 0 26 0 1 0
FC GS 2004 7 0 12 0 0 0
통산 (K리그) - 320 3 356 0 7 0
K리그 통산기록은 리그컵기록 포함. 2011년 3월 1일 기준

지도자 프로필


소련 시절

소비에트 연방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현재 타지키스탄) 두샨베에서 태어난 신의손은 1978년 두샨베의 SKA-파미르 두샨베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신의손은 이 팀에서 서브골리에 그치며 낙담했고, 81시즌 CSKA 모스크바로 이적했지만 4경기 5실점으로 주전자리를 꿰차지 못했다. 사리체프는 82년 FC 토르페도 모스크바에서 서서히 주전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161경기에 나와 153실점을 기록했다. 사리체프는 이 때 UEFA컵 무대를 밟아보기도 하였고, 1991년에는 소비에트 연방 올해의 골키퍼로 뽑혔으며 100경기 0점대 방어률을 기록한 골키퍼만 가입할 수 있는 구소련 프로축구 리그의 야신 클럽 가입자이기도 하다. 소련내에서도 탑클래스로 꼽히던 사리체프가 당시만해도 소련보다 수준이 낮았던 K리그에서 뛰었으니 당연히 엄청난 기록이 나올수 밖에 없었다.


천안 일화 시절

일화 시절 사리체프

91시즌이 끝난 뒤 사리체프는 당시 아르센 뱅거감독이 이끌고 있던 프랑스의 AS모나코와 이스라엘의 마카비 텔 아비브에서 테스트를 받고 합격점을 받았지만, 이적시기가 맞지 않아 무산되었다. 그 와중에 일화 천마가 사리체프에게 테스트 제의를 했고, 사리체프는 목동구장에서 다른 선수 둘과 함께 테스트를 받았다. 자체 청백전에서 사리체프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경기가 끝난 뒤 일화와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2] 통역도 없었고 32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낯선나라에서의 생활은 그에게는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일화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수비부분에서 막장을 달리는 수비 최악의 팀이었다. 91년 일화의 팀 실점은 무려 63실점, 리그에서 꼴찌였다. 박종환 감독은 이것이 마지막이다라는 심정으로 사리체프를 기용했고, 이 선택은 대성공을 거뒀다. 92년 사리체프는 40경기에 출장해 32실점을 마크하며 첫 시즌만에 0점대 방어율을 정복해버리더니, 93년 35경기 33실점으로 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이듬해인 94년 36경기 33실점으로 3년째 0점대 실점률을 기록하더니, 95년에는 35경기에 실점은 단 27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3연패에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되었다.[3] 결국 이 여파로 국내 다른 구단들이 앞다투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기 시작했고, [4] 국내 골키퍼들의 입지는 좁아졌다.[5] 결국 고심 끝에 연맹은 96년부터 외국인 골키퍼 쿼터제를 도입하면서 외국인 골키퍼들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 여파는 사리체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쿼터 첫해인 1996년 27경기 51실점으로 부진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97년에는 16경기 27실점, 외국인 골키퍼가 사리체프 단 한명이었던 98년에는 단 5경기에 나와 16실점을 기록하며 추락. 98시즌이 끝난 뒤 천안에서 방출되었다.


안양 LG 시절

천안에서 내쫓기듯 방출된 사리체프에게 손을 내민건 안양 LG였다. 당시 안양은 수비불안으로 하위권을 전전하던 상황이었고, 이에 특단의 조치로 사리체프를 영입하게 되는데 99년 연맹이 K리그 외국인 골키퍼 보유 및 출전 금지 조항을 발동함에 따라 골키퍼 코치라는 꼼수(?)로 바꿔서 영입하게 되었다. 안양은 사리체프 코치를 통해 수비 안정화를 꾀했지만, 초보 코치였던 사리체프는 안양의 수비를 바꾸지 못했다. 당시 안양의 골키퍼 김봉수임종국은 하나같이 불안한 모습을 연출했고, 결국 안양은 10개팀 중 9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결국 2000시즌 안양은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사리체프를 한국으로 귀화시킨것이었다. 한국을 좋아하던 사리체프도 귀화에 OK를 택했고, 구리 신씨를 시조로해 신의손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6] 2000년 사리체프는 신의손이라는 이름으로 그라운드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당시 축구인들은 훈련한지 10일도 안된 신의손이 성공하기에는 매우 어렵다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신의손은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갔다. 2000년 32경기 35실점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2001년 35경기 29실점으로 다시한번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하지만, 세월은 거스를 수 없었는지 2003시즌 18경기 26실점을 기록했다.


은퇴

신의손은 FC GS에서 뛰던 2004년 8경기 12실점을 기록했고 그해 8월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통산 기록은 320경기에 출전 356실점을 기록했고, 4회 K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지도자

신의손은 2005년까지 FC GS 골키퍼 코치로 코치생활을 시작했고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박항서 감독을 보좌하여 경남 FC에서 골키퍼 코치를 역임했다. 2009년 신의손은 여자축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WK리그 고양 대교 눈높이 축구단에서 골키퍼 코치, 수석코치를 역임했다. 2012년부터 안익수 감독의 부름으로 부산 아이파크 GK 코치로 활약하게 되었다.


에피소드

  • 당시의 사리체프의 활약이 어떠했는지 다른 선수들의 증언을 들어보도록 하자.
느낌상 분명 '골이다' 싶어 세리머니를 펼치려는 순간 손을 뻗어 막아냈다. '이번에는 정말 들어갔다' 싶어 동료들에게 뛰어가려는 순간 발을 뻗어 막아냈다. 정말 밉더라 (by 차상해. 참고로 1993년 득점왕이다.)
  • 하지만 천하의 신의손도 두려워하던 공격수가 있었는데, 바로 포항 스틸러스에서 활약한 라데였다. 라데는 최전성기 신의손을 상대로 가장 많은 골을 뽑아낸 선수이기도 하다.
  • 2000년 11월 12일 목동종합운동장에서 펼쳐진 부천 SK와의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 신의손은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다. 전반전 문전 혼전 중 그는 부상을 당하며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고, 대기 명단에 골키퍼를 올리지 못한 안양 조광래 감독은 후반전에 임시로 공격수인 진순진에게 골키퍼 장갑을 맡기며 어렵게 경기를 펼쳤다. 그만큼 신의손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 1992년 사리체프가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자 일각에서는 국가대표를 위해 사리체프를 귀화시키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사리체프는 귀화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1997년 타지키스탄 국가대표에 본의 아니게 선발되면서,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발은 물건너가게 되었다. [7]
  • 리그 로컬룰까지 뜯어고칠 정도로 K리그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선수였지만, 외국인 선수라는 이유만으로 K리그 시즌 MVP는 물론 K리그 공로상이나 특별상도 받은적이 없다. K리그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라 할만할듯. (이는 라데 선수도 마찬가지로, 환상적인 활약에도 불구 K리그 시즌 MVP를 수상하지 못했다.)
  • 일화 천마 입단 당시, 러시아에서 가족들도 모두 데려와 한국에 정착했다. 문제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이라 한국 소재 외국인학교에 보내야했는데.. 외국인학교는 워낙 학비가 비쌋던 탓에 그냥 한국에 위치한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시켜버렸다..; 한국어 하나 모르는 애들을 -0- .. 다행히 아이들은 쉽게 학교생활에 적응하여 지금은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한다.[8] 다만 현재 샤리체프 부인은 러시아로 돌아가고 자녀들은 각각 미국과 캐나다에 유학을 간 상태라고.[9]


참조

  1. 다른 한명은 신태용이다.
  2. 당시에는 사무실에서 체결하지 않고 구장에서 체결할 정도로 형식과 절차가 없었다
  3. 이러한 업적은 사리체프 혼자만이 아니라 안익수, 박광현, 겐나디 등을 필두로 한 수비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4. 대표적인 예로 부천의 샤샤, 전북의 알렉세이, 수원의 헨릭, 포항의 드라간등이 있었다.
  5. 국내 골키퍼 가운데 주전 골키퍼 자리를 차지한 선수는 현대의 김병지와 LG의 김봉수가 전부였다. 이렇다보니 리그에서 뛰지 못하는 골키퍼가 국가대표에 불려가는 일도 허다했고, 이것은 94 월드컵 최인영과,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 대회 차상광의 알까기로 이어졌다.
  6. 신의손은 일화에서 활약할 당시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는데 그 별명이 나쁘지 않았던 신의손은 이를 택했다는 후문이다.
  7. 1997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의 A매치가 예정되어있던 타지키스탄은 당초 내한키로 했던 선수단 가운데 우즈베키스탄 프로축구에서 뛰는 선수들이 불참, 국가대표 12명만이 내한했고 국내 프로축구에서 뛰는 사리체프(천안 일화)와 비탈리(전북)가 가세해 간신히 14명이 출전한 것. 따라서 부상자가 발생할 경우 대기 선수이던 비탈리를 투입키로 했던 타지키스탄은 후반 6분에 비탈리를 들여보낸뒤 여유 선수가 없자 경기 종료 10여분을 남기고 코치이면서 선수로 등록한 로자노프를 투입했다. 이런게 A매치로 인정되면서 사리체프의 대한민국 국가대표 꿈은 날아갔다
  8. 물론 샤리체프도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모두 구사하며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다.
  9. 참고기사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170661&date=20111216&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