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산 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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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완산 푸마.jpg
완산 푸마 엠블럼

소개

완산 푸마란 1992년 3월 대한축구협회에 창단 신청한 후, 1992년 7월 창단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가 1993년 3월 부도처리된 축구팀이다. 정식 창단도 못하고 망했다고 해석함이 옳을듯. 명실공히 K리그의 흑역사 중 하나다.


역사

호남연고 프로팀의 부재

1983년 리그출범 당시에 국민은행 축구단이 전라도로 연고지를 배정받았지만 1984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실업무대로 되돌아갔다.1985년부터는 원조 할렐루야 축구단이 전라도로 연고지를 재설정했으나 1985년을 마지막으로 실업구단으로 전환했다. 전라도 연고팀이 없어지자 전라도 연고 프로팀의 창단이 축구계에 대두됐고, 창단을 추진한 결과, 1987년 미원과 광주고속을 포함한 호남 8개기업이 공동출자로 창단을 추진하게되는 성과가 있었지만, 지분 35%가 모자라서 무산된다.[1] 1989년에는 신생팀 일화 천마 축구단을 전라권을 연고지역으로 하여 창단시키려했으나 이마저도 무산된다. 당시 김우중 대한축구협회장이 호남팀 창단에 실패하면 대우 로얄즈를 호남연고로 할 의사가 있음을 밝힌적이 있어서 공론화가 됐지만 대우 로얄즈구단이 거부한다. [3]</ref> [4]</ref>

완산 진도개 축구단 창단 구상

1991년 9월, 전라북도 전주에서 가칭 완산스포츠클럽(혹은 전라스포츠클럽)이 운영하는 완산 진도개 프로 축구단의 창단 구상 발족회가 열리면서 처음 완산 푸마 창단의 구상이 공개되었다. 당시, 완산스포츠클럽 대표였던 오형근[2]씨는 해외자본과 향토기업 투자 유치 및 입장 수입 등을 토대로 자본금 3,40억을 마련후, 연간 20억 선에서 팀을 운영할 계획을 구상중임을 발표했다.

전라권 축구단 창단이 연이어 무산된 경험이 있던 대한축구협회는 호남권을 연고로 하는 제 7구단 창단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고, 이런 시점에 완산스포츠클럽의 등장은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이에 따라 대한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의 전폭적인 후원과 함께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진행된 제 7구단 창단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불안요소를 내재하고 있었다.


완산 푸마 창단 승인

파일:완산푸마.JPG
92년 7월자 기사

이듬해인 1992년 3월, 완산스포츠클럽은 스포츠 용품 판매사인 푸마[3]와 2년 동안 총 25억의 스폰계약을 체결했음을 발표하며 축구협회에 가입금 2천만원을 납부 후, 공식 명칭 완산 푸마 축구단으로 같은 해 6월까지 선수단을 구성하여 아디다스 컵대회에 참가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시점부터 언론들은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는데 왜냐하면, 오씨 주장과는 별개로 실제로 스폰대금이 입금되었다는 정황은 전혀 포착되지 않았고, 1992년 2월부로 대학을 졸업한 축구 선수들은 동년 3월 현재시점에서 이미 제각기 프로 내지 실업팀으로의 계약을 끝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돈도 없고 지명할 선수도 없는데 무슨 수로 6월까지 팀을 창단해 참가하겠냐는 의미였다. 이에 대해 완산스포츠클럽은 K리그 타 구단와의 협의를 통해 각 팀 당 2명씩 92시즌 1년동안 임대해 팀을 운영하겠다는 등의 복안을 마련했으나, 실현가능성은 없었다. 결국 예정했던 92년 6월 컵대회 참가도 물건너가고, 혼선을 빛었으나 같은해 7월 대한축구협회는 K리그 6개 구단주 협의회를 소집하여 장고 끝에 완산 푸마의 창단을 승인하였다.당시 6개 구단주들은 운영주체도 불분명한 완산 푸마의 참가를 탐탁치않게 여겼으나,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서는 추가적인 팀 창단이 절실하다는 축협의 대승적(?) 주장에 수긍하고 말았다.(우측 기사 참조)


파문의 연속과 해체

창단 승인 이후 공식화된 완산 푸마 창단준비위원회는 7월, 정규풍 씨를 3년계약으로 완산 푸마 창단 감독으로 계약하고, 92년 11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1993년 드래프트에 참가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프로축구연맹은 완산 푸마에 창단팀 우선 지명권을 부여해 당대 대학권 최고급 선수였던 황선홍, 강철, 정재권, 노정윤, 김태영 등이 완산 푸마에 지명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완산 푸마의 상황을 누구보다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선수들은 드래프트 거부를 불사하며 완산 푸마 지명을 회피하려 노력했고, 그 결과 노정윤 선수는 J리그 진출, 정재권, 김태영 등은 실업팀에 입단하는등 파행을 겪었다. 황선홍 선수의 경우는 1993년 드래프트에서 완산 푸마에 1순위로 지명되었으나 황선홍과 가계약을 이미 맺어놨던 포항 제철측이 완산 푸마측과 사상 유례없는 1:5 트레이드를 감행함에 따라 황선수는 포항제철에 입단하게되었다. (자세한건 1993년 드래프트 참조)

우여곡절 끝에 드래프트와 입단테스트를 통해 총 26명의 감독, 코칭스탭, 선수단이 완성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이듬해인 1993년 2월 초, 정규풍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탭과 완산 푸마 선수단 전원이 작년 11월 선수단 구성이후, 총 3개월동안의 임금체불이 있었고, 드래프트 지명 계약금 또한 미지급 받았음이 폭로되면서 완산 푸마는 본격적으로 좌초 상황을 겪게 된다. 상황이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없음을 감지한 프로축구연맹측은 다가오는 1993년 2월 28일, 즉 93시즌 K리그 선수 등록 마감일까지 '완산 푸마는 선수 계약금과 임금 미납분 문제 해결할 것, 당초 예정되있던 총 20억 남짓의 1년 시즌 운영자금이 존재함을 증명할 것' 등을 완산 푸마 프론트에 요구했다. 그러나, 1년여전 오씨가 주장했던 푸마와 몬테로사 인터내셔널로부터의 스폰 대금 지급은 전혀 없었고, 받아낸 약속은 93시즌이 시작하고 완산 푸마가 리그에 참가함이 확인되면 스폰 비용을 입금하겠다 뿐이었음이 드러났고 이 문건의 폭로와 함께, 완산 푸마의 운명은 결정되고 말았다.

결국 2월 28일 등록기간까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완산 푸마는 93시즌 참가와 92년 7월의 창단 승인 모두가 소급하여 무효가 되어버렸고, 완산스포츠클럽과 완산 푸마 축구단은 부도처리되었다. 정규풍 감독을 비롯해 완산 푸마 선수단 대부분은 밀린 계약금과 3개월치 임금 총 3억여원을 전북은행이 발행한 약속어음으로 지급받았으나, 3월 3일 어음 발행주체의 부도처리와 함께 휴지조각이 되버렸고, 이로 인해 법정 분쟁이 벌어지는 등, 완산 푸마 소동의 휴유증은 93년 내내 끊이질 않았다.


제우 엑스터 축구단

파일:완산 푸마3.JPG
제우엑스터 프로축구단 조인식 장면

완산 푸마 축구단 자체는 와해되었으나, 선수들 중 타팀으로 이적할 수 있었던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 이도저도 할 수 없었던 십수명의 선수와 최상철 감독대행을 비롯한 코칭스탭은 훈련을 계속하며 93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참가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행보를 계속했다. 이를 두고볼수만은 없었던 대한축구협회측도 호남권 향토기업과 당시 K리그와 컵대회 스폰등을 맡고있었던 기업들에게 완산 선수단 인수를 권유했으나, 일이 잘 풀릴리 만무했다.

겨우겨우, 93년 8월 컴퓨터 조립업체였던 제우정보에서 선수단을 인수하고 가칭 제우 엑스터 프로 축구단 창단 발표와 94시즌 참가를 선언하였으나, 제우정보가 경영 위기를 맞으면서 스폰 포기 (95년 4월에 제우정보는 부도처리되었다.), 결국 전북일보와 보배소주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한 전북 버팔로 축구단이 창단되면서 완산 푸마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

완산 푸마 사태가 남긴 영향

  • 억지춘양식 팀 불리기 시도를 했다가 욕만 들어먹은 대한축구협회와 한국프로축구연맹은 K리그에 창단팀이 가입하기 위해서는, 연맹 가입비축구발전기금 등을 납부해야한다는 진입장벽을 설정하였다. 이 조항은 내셔널리그 팀들의 K리그 승격을 가로막는 주요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 1993년 드래프트에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완산 푸마에 지명되어 고생을 했던 선수들의 선례가 생김에 따라 드래프트에 대한 불신과 회피 시도가 더욱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드래프트 존폐 논란이 더욱 확산되었고, 드래프트 참가를 거부하고 실업 및 해외무대 진출을 모색하는 대학 선수들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 요약하면 완산 푸마 사태란 한 실업가가 제대로 된 실질자본도 없이 관중 수입과 향토기업 후원, 외국 자본 유치 등 불확실한 수입원에 기대어 장미빛 미래를 그렸는데.. 이런 몽상에 가까운 시나리오에 대한축구협회와 한국프로축구연맹이 동조한데 따른 하나의 해프닝이자 흑역사급 사건이었다..


갤러리


같이 보기


참고

  1. 금호그룹, 미원, 삼양사, 쌍방울, 영진약품, 아남산업, 세방산업, 조선내화등이 관심을 보이다. 이후 삼양사,영진약품,조선내화가 빠지고 크라운제과가 빈자리를 채운다. 출자하기로 했던 지분은, 미원 30%,금호(광주고속) 10%,크라운제과 10%,세방 5%,쌍방울 5%,아남산업 5%로 총 65%에 불과했다. [1]
  2.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분의 과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기도 하다. 전북현대의 위상이 높아지자 자신의 흑역사라 할 수 있는 축구단 창단을 알맹이만 쏙 빼고 업적으로 이야기하시는데... [2]
  3. 이때 스폰을 해주기로 한 푸마는 몬테로사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로 푸마제품에 대한 한국 라이센스를 가진회사였다. 1993년말에 이랜드에 인수되면서 푸마 한국 라이센스도 이랜드가 가지게 된다. 완산푸마가 제우엑스터로 개명하자 이랜드는 1992년에 임마누엘축구단을 인수해 창단한 이랜드 축구단을 이랜드푸마축구단으로 개명하는데 완산푸마 축구단과 이랜드푸마축구단은 무관하다.2007년을 마지막으로 푸마와 이랜드의 계약은 연장없이 종결됐고 2008년부터 독일본사가 직영으로 한국법인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