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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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섭 (1977년 3월 11일생 ~ )은 2002년부터 2010년까지 K리그에서 활약한 수비수이다.

프로필

이름 : 박진섭

생년월일 : 1977년 3월 11일생

포지션 : 라이트 풀백

소속팀 변천사 : 고려대 -> 상무 -> 울산 현대 -> 성남 일화 천마 -> 부산 아이파크

국가대표 경력 : 35경기 5골 (1998년 11월 A매치 데뷔, 2000년, 2004년 AFC 아시안컵 대표)

K리그 경력

소속팀 연도 출장 교체 득점 도움 파울 경고 퇴장
울산 현대 2002 33 10 2 4 51 3 1
울산 현대 2003 41 10 1 6 65 6 0
울산 현대 2004 28 2 0 2 42 6 0
울산 현대 2005 14 0 0 2 17 3 0
성남 일화 천마 2005 21 5 0 1 25 3 0
성남 일화 천마 2006 35 18 0 3 34 2 0
성남 일화 천마 2007 24 8 0 4 27 7 0
성남 일화 천마 2008 35 3 0 2 31 6 0
부산 아이파크 2009 27 1 0 1 29 8 0
부산 아이파크 2010 - - - - - - -
통산 - 258 57 3 25 321 44 1

설명

1. 청소년대표시절


배재고등학교 재학 시절, 일찌감치 청소년대표로 발탁될 정도로 개인 기량이 뛰어났다.

1996년 19세 이하 아시아청소년선수권에서 스위퍼로 출전. 세트피스에서 공격 가담 능력이 뛰어났고 활동량도 좋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96 아시아청소년선수권은 한국에서 치루어졌고 이 대회를 한국 청소년대표가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전승 18득 3실)하였기에, 박진섭 선수를 비롯해 1977, 1978년생 선수들에 대한 기대감이 매우 높았다.

(참고 : 이관우 양현정 안효연 정유석 서기복 심재원 등이 이 때 스타가 된 선수들이다.)

2. 세계 대회에서의 좌절


1996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 우승을 통해 출전 자격을 얻었던 1997년 말레이시아 U-20 월드컵. 여기서도 박진섭은 본선 3경기 모두 출장하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알다시피 대참패. 지금도 쿠칭 쇼크로 회자되는 그 대회다. 여기서 한국 청소년대표팀은 1무 2패 5득 15실로 주저앉는다. 그나마 박진섭 선수는 2차전이었던 프랑스 전에서 2골을 몰아쳐 체면치레했다고 좋은 평가를 받았고, 덕분에 심재원과 함께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로 선발되었다.

(참고: 기대를 모았던 서기복 정유석 김도균 안효연 등은 97 쿠칭 쇼크로 인해 아시안게임 엔트리서 제외되었고, 모두 비운의 선수 루트를 밟게 된다.)

(참고 2 : 이즈음에, 박진섭 선수는 스위퍼에서 오른쪽 풀백으로 포지션 체인징을 하게된다. 포지션 이해도가 높았고 개인기가 뛰어났던 박진섭 선수였기에 포지션 체인징은 성공적이었고, 덕분에 송종국 등장 이전까지 오른쪽 풀백에서 박진섭만큼 경쟁력을 갖춘 선수가 없었다. 그만큼 박진섭의 가치가 높아졌음은 물론이고.)

3. 유럽진출 선언과 상무 입대


1998년 아시안게임에서 첫 A매치 출장한 이후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던 박진섭은 당시만 해도 고려대학교 재학생이었다. 이에 많은 K리그 팀들이 드래프트에서 박진섭을 최우선 지명 대상으로 놓았음은 자명했다. 그러나, K리그보다 유럽행을 원했던 박진섭은 당시 김도균, 최용수 웨스트햄 입단 떡밥이 터졌을때, 덩달아 해외진출을 선언했었다.

그러나 박진섭 선수는 A매치 출전 경력이 모자랐으므로 워크퍼밋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당시 김도균도 마찬가지) 결국 유럽행 선언은 없던 일이 되었고 박선수는 당시 실업축구에서 뛰고 있었던 상무에 입대해 군문제 해결을 결심하게 된다.

4. 울산 입단 후


상무 시절에도 올림픽대표와 국가대표로 불려다니며 꾸준히 A매치를 소화하던 박진섭은
(히딩크로 넘어오면서 박진섭은 팽당하긴 했으나 한 때 좌영표 우진섭 ㅎㄷㄷ은 한국축구의 트렌드였다.)
2002년 제대와 함께 울산 현대에 자유계약으로 입단했다. 당시 울산은 박진섭에게 계약금만 3억을 책정하면서,화제가 되었다.

(참고 : 이천수 현영민 전재운 등 2002년 울산이 지른 신인의 퀼리티가 워낙 좋았다. 박선수를 포함해 이들을 영입하기 위해 울산이 뿌린 계약금만 무려 20억이 넘었다.)

기대를 모은대로 울산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였고, 이를 바탕으로 2004년 아시안컵 대표로 발탁, 선발로 활약하기도 했다.

(참고 : 이 대회에서 박진섭은 네팔전에 출전. 대한민국 축구 A매치 사상 1경기 최다골 (15골) 득점중 5골을 혼자 집어넣으며 잠깐 화제가 되기도 했다.)

5. 성남 시절


2005년 시즌 도중 울산 현대의 박진섭의 성남 행이 확정되었다. 이적료는 계약금 포함 10억. 연달아 터졌던 김두현 성남행과 함께 이후 3년동안의 K리그 판도를 뒤흔드는 이적이었다. 성남에 입단하자마자 성남 플랫 4의 한축을 차지해버린 박진섭 선수는 그후 4년동안 성남의 영광을 지탱하며 수많은 영예와 호사는 다 얻었다.

6. 부산 입단 후


2008년 시즌이 끝나고 신태용 감독 대행이 들어서면서, 박진섭, 김상식, 김영철 등 기존 성남의 베테랑들이 개혁의 철퇴를 맞고 뿔뿔이 흩어졌다. 박진섭은 본래 대구 FC 행에 관심을 보였으나, 막판에 부산이 거액을 제시하면서 부산에 입단하였다. 부산에서 리그 경기 대부분을 소화했으나, 활동량은 성남 시절에 비해 많이 처지는 편이었다. 그래도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무난한 활약을 보여줬고 2010시즌 새 주장으로 선임되면서 여전히 황감독 플랜에 핵심 선수임을 입증했다.

그러나 2010시즌 종료 후, FA가 된 박선수는 높은 임금을 요구한데다 황감독이 물러난 후 부임한 안익수 감독이 박선수와의 재계약 철회 의사를 밝히면서 부산을 떠나게되었다. 이후 은퇴한것 같았는데 2011시즌 미포조선에 입단한다는 소식이 들려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