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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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무대(Counter Intelligence Corps,CIC)는 1950년대, 군사 기밀을 다루던 육군본부 소속 특무부대의 약칭으로 현재의 기무사령부의 전신이다.

특무대 축구단은 1950년대 최강의 축구단으로 명성도 높았으나 경기에 지면 난리를 피워 무효화 하는 등 악명도 높았다.


특무부대[편집]

4대 특무부대장 김창룡(51.5.15~56.1.30)

특무부대는 군의 정보와 방첩(防諜)에 관한 일 및 그에 따른 범죄 수사를 맡아보던 군의 특수 부대이다. 1948년 5월 27일 창설된 육군정보국 정보처 특별조사과가 모체로, 1950년 육군직할의 특무부대가 창설되었다. 친일파로 일제시대 만주 관동군에서 정치 공작을 담당하다가 해방후 군에 투신해 온갖 조작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한 김창룡이 4대 특무부대장이었다.[1] 1960년 방첩부대로 개칭되었다가 1968년 육군보안사령부로 개칭되었다. 1977년에 이르러서는 1953년에 해군 방첩대(보안부대), 1954년 창설된 공군 특별수사대(보안부대)를 통합하여 국군보안사령부가 되었다. 국군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정권 장악 의도에 따라, 보안사는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등에 관여 하였다. 쿠데타를 위해 방해되는 인물들(노무현, 이해찬, 문익환 목사 등)을 미리 감시하는 민간사찰(청명계획)을 계속 해왔으며, 결국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고발하는 양심 선언을 한 이후 1991년에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되고 역할이 축소되었다.

특무대 축구단[2][편집]

특무대 축구단은 한국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있던 1951년 10월 김창룡 당시 특무부대장의 주도로 창설되었다. 당시 김창룡의 나이가 35세에 불과했지만 이미 국군내에서 수사권을 독점하고 있였으며, 이승만과 직통 보고라인이 있는 실세였다. 이러한 김창룡의 권력을 바탕으로 전국에 있는 유명 선수들을 끌어모으면서 축구계를 호령하게 되었다[3].

특무대 축구단은 경기를 지면 (또는 질거같으면) 벤치 측에서 선수단을 철수시켜 경기를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압권은 1955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벌어졌다. 당시 헌병감실과 특무대는 전국축구선수권 결승에서 1차전 0:0으로 승부가 나지 않자 재경기까지 벌이는 등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데 정규 시간 동안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자 연장전에 들어가게 된다. 연장전도 종료되기 3분여를 앞둔 상황, 헌병감실이 극적인 골을 성공시키며 앞서나가자 특무대 벤치측에서 특무대 선수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린다. 특무대 선수들은 군소리 없이 퇴장해 순식간에 경기는 중단되었고, 주심은 이도저도 못하다 노게임을 선언하였다. 이 사건으로 현정주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사임하였으며 당시 헌병감실 vs 특무대 경기 주심이었던 김영근[4]씨는 다시는 심판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처럼 각종 설화를 일으켰음에도 특무대 축구단은 황금다리 최정민 등 수많은 국가대표를 배출한 팀으로 1950년대 최강의 축구단으로 한국축구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특히 1958년에는 헌병감실함흥철, 김찬기, 우상권만 보강하고 나머지 전원은 특무대 선수로 구성된 '서울 구락부' 팀을 구성, 동남아 원정을 떠나 40여일 동안 14승 3무의 빼어난 성적을 거두고 돌아오며, 당시 말레이시아와 그 외 동남아 국가들을 중심으로만 돌아가던 AFC에 한국 축구의 위력을 각인시키기도 하였다. 실제로 서울 구락부의 동남아 원정 직후인 1959년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메르데카컵 참가와 AFC U-19 챔피언십 참가 자격이 주어졌을 정도..

이처럼 축구계를 호령하던 특무대 축구단은 1965년 예산 문제 등 군부대 여건상 더 이상 축구팀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동년 4월 춘계실업축구연맹전을 마지막으로 6월 8일 축협에 해체를 통보해 순식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5] 해체 후 구 특무대 선수들은 비슷한 시기 해체된 헌병감실 축구단의 선수들과 함께 공병단 축구단에 합류하여 '육군 대표'라는 이름으로 경기에 출전하였다.


주요 성적[편집]


유명 선수[편집]

특무대 축구단 주요 선수
민병대[6]최정민조윤옥장경환박일갑차태성김지성한창화박재승


에피소드[편집]

  • 1955년 전국축구선수권에서의 일화 이외에도 김창룡 당시 특무부대장 덕분에(?) 잇단 기행이 펼쳐졌던바 있다. 한번은 군축구대회에서 특무대가 모사단을 상대로 5:0 완승을 눈앞에 두고있던 찰나,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해가 져버리는 통에 경기는 무효 선언이 되는듯했다. (당시는 야간조명 시설이 전무하던 시절이라, 해가 지면 자동 노게임 후, 다음날 재경기가 치러졌다.) 이를 안 김창룡은 노발대발하며, 경기가 벌어지던 장소 바로 옆에 위치했던 군부대에 차량을 모조리 징발했고 차량들을 운동장에 도열, 라이트를 켜게하여 운동장을 밝히고 이제 조명이 생겼으니 경기를 속개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하지만 규정상 경기는 무효 선언이 되버렸고, 김창룡에게 밉보인 당시 경기 심판 김덕준 씨는 한바탕 곤혹을 당하다 담벼락을 넘어 도망을 쳐야만 했다.[7]
  • 1952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전국선수권대회 준결승전은 대구에서 열렸는데, 이 경기가 조선방직 vs 특무부대였던 것. 경기는 특무대의 PK 실축과 조선방직의 홍덕영 선수의 분전으로 0:0 무승부가 되었고, 규정에 따라 추첨을 통해 경기 결과가 결정나게 되었다.[8] 이미 0:0 무승부에다 주최측의 실수로[9] 김창룡의 화는 머리끝까지 나있었는데 추첨 결과는 조선방직의 승리.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조선방직 응원단의 환호성을 가라앉히고 있었던 손기정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리스트인 그 분 맞다. 당시 조선방직 대구 지점 간부셨다고..) 씨는 김창룡 에게 딱 걸렸고, 김창룡은 손기정 씨를 연행해 가버렸다. 위협을 느낀(?) 축협 이사 및 당해 경기 주심이었던 배종호 씨는 경기장에서 달아났고, 아수라장이 된 경기장에서 조선방직 사장 강일매 씨[10]는 급히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소연을 넣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손기정 씨가 석방되면서 아수라장이 되었던 경기는 간신히 막을 내렸다고 한다.[11]


같이 보기[편집]


참고 사항[편집]

  1. 김창룡은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명되기도 했다. 김창룡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위키백과를 참고하세요.위키백과:김창룡
  2. 특무대 축구단은 특무부대의 명칭 변경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바뀌어 불렸는데 CIC 축구단, 방첩부대 축구단 등이 다 동일 팀을 달리 부른 것임에 유의할 것.
  3. 당시는 전시 상황이었으므로 축구 선수들도 모두 징집된 상태였다. 언제 전방에 끌려가 죽을지 모르는 것보다는, 후방에 있는 특무 부대에 근무하는 것을 선수들이 선호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여기에 축구까지 계속할 수 있었으니 금상첨화였던 셈. 그러나 무조건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은 몰랐을 듯..
  4. 확실하진 않지만 김용식 옹과 함께 일제 치하 당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 축구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던 고 김영근 선생과 동일인인 것으로 보인다.
  5. 방첩부대축구팀 15년만에 해체 <동아일보> -1965년 6월 10일-
  6. 코치 겸 선수였다.
  7. 관련 기사 : [1]
  8. 승부차기가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 이전까지는 정규시간 내 무승부가 나올 경우 재경기 혹은 동전 던지기로 승부가 났다.
  9. 재경기를 원했던 특무대 측이 추첨장에 나오지않자 축협 이사가 특무대 빨리 나오라라고 말했던 것. 그러자 김창룡은 특무대는 소대를 말하는거야! 우리는 소대가 아니라 부대인데 저 XX 뭐라는거야? 하고 열받았던 상황.
  10. [2] 해당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그 역시도 이승만의 핵심 심복 중 한명이었다. 실세 vs 실세의 장외대결..
  11. 관련 기사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