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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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는 1964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민국에 존재하였던 기업체로, 보통 흥한화섬(興韓化纎)으로 불리었다.[1]

1972년 8월 흥한화섬 축구단을 창단했던 전적이 있다.


흥한화섬[편집]

흥한화섬은 화신백화점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던 박흥식 씨가, 한일수교 정상화와 박정희 군사정권의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 시행을 투자 기회로 삼아 국내외 차관과 기술력을 빌어 섬유 제조업에 뛰어들고자 1962년부터 구상한 기업체였다. 본래 유통업에서 강점을 갖고있었던 박흥식 씨의 화신그룹은 6.25 동란을 거치면서 쪼그라든 유통업계를 탈피하고 제조기업으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한일수교 정상화로 일본의 기술력과 자본을 빌어오는게 가능해지자 곧바로 사업 계획에 착수, 일본 동양레이온(오늘의 도레이, 東レ株式会社)에서 550만 달러 규모의 비스코스 인견 생산기계를 들여오고 서독에서 발전기를 비롯해 각종 기계를 총 510만 달러 규모로 들여오며 국내에서 화신그룹 자체 조달 15억, 산업은행에서 차입 10억 등을 통해 자본금을 마련, 일 생산량 15톤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섬유제조공장을 세운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으로 옮긴다. 그리하여 1964년 6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오늘의 경기도 남양주 도농동)에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공장 착공식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위에서 열거한 자본금 조달이 녹록치 않았다는데 있었다. 우선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온 것은 좋았으나, 기계들이 동양레이온에서 한참쓰다 내준 구형인데다 그 수량도 많지않아서 일 생산량 15톤 달성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2] 자체조달 15억 + 산은 차입 10억이란 국내 조달 목표분 중 공장 착공 1년여가 지난 1965년 달성한 것은 고작 자체조달 4.8억 + 산은 차입 7천만원으로 목표치의 35% 가량에 그쳤다. 이에 급해진 박흥식 씨는 산업은행의 지불보증을 끼고 조흥은행으로부터 3.5억원을 차입하여 준공을 서두르고자 했으나.. 이 대출건이 부당하게 집행되었음이 야당에 의해 폭로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흥한화섬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식어버렸다. 정부의 관심이 식자, 일본과 서독 측도 기술을 제대로 내줄리 만무.. 결국 박흥식 씨와 화신그룹은 자사 사옥과 토지 등을 처분하면서 필요 자본금을 자체적으로 충당한 끝에,[3] 1966년 12월에야 겨우 공장을 완공시키고 가동에 들어간다. 착공 당시 계획한 66년초부터 일 15톤 생산 달성이란 원대한 포부는 계획보다 1년 가량 늦은 67년에야 겨우 공장 첫 가동 달성에 성공하는등 삐걱댔지만, 일단 당시까지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비스코스 인견을 국내에서 전량 충당함은 물론 해외로 수출해 외화까지 벌어들인다니 첫 가동 당시 평은 좋았다고 한다. 가동 첫날 청계천 섬유 시가가 폭락했을 정도였다고..

하지만 기쁨도 잠시, 비스코스 인견을 대신할 신종 화학섬유와 합성섬유들이 잇달아 한국에 소개되면서 흥한화섬의 매출 창출은 경색되기 시작한다. 앞서 '일단 공장부터 짓자'는 생각에 자산을 헐값에 내놓으면서까지 일을 벌인 탓에, 흥한화섬의 매출 실적이 부진해지자 조흥은행과 산업은행 차입금 방어도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위에서 말했듯이 군사정권의 흥한화섬에 대한 관심도 차갑게 식은지 오래였던 탓에 상환 부담은 오로지 박흥식 홀로 짊어져야만 하는 상황이었다.[4] 결국 흥한화섬은 공장 가동 20여개월 만인 1968년 9월, 차입금 방어 실패로 산업은행에게 당초 담보로 제공했던 흥한화섬 주식을 고스란히 넘겨주게 되었고 이로써 산업은행은 흥한화섬 지분율 51%를 상회하는 대주주로 등극, 경영권을 박흥식 회장으로부터 이양받게 된다.

이렇게 산업은행에 경영권이 넘어간 흥한화섬은 1972년에는 세진레이온, 1976년에는 원진레이온으로 사명을 변경하며 계속 경영을 이어갔으나, 비스코스 인견 제조 공장이라는 상품성의 한계와 오일쇼크 등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해 이후로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가 기사회생하는 갈지자 행보를 이어갔고 여기에 원진레이온 사태로 대표되는 환경재해의 온상이 되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키다 결국 1993년 폐업처리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흥한화섬 축구단[편집]

흥한화섬 축구단은 1972년 8월 창단하였다.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흥한화섬은 1972년 당시, 산업은행에게 경영권이 넘어간 상태였고 주채권단에서 오너로 탈바꿈한 산업은행, 조흥은행 등의 강한 입김 아래 경영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볼 때, 흥한화섬 축구단의 결성은 당시 장덕진 씨의 권유에 은행 축구팀을 잇달아 창단하며 충성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산업은행과 조흥은행 등이 자사에 축구단을 창단한 것도 모자라,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흥한화섬에까지 축구팀 창단을 강행한 결과물이 아니었나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억지춘양으로 창단된 흥한화섬 축구단이 제대로된 전력을 갖추기란 무리였고, 설상가상으로 축구단 창단 무렵에 흥한화섬 경영권은 산업은행에서 원진그룹으로 넘어가버린 상태였다. 오너 눈총 때문에 축구단을 창단했는데, 오너가 바뀌었으니 축구단이 더 존속될 이유가 없었고 결국 1973년 춘계축구연맹전에 참가할 예정이라는 짤막한 소개 기사를 마지막으로 흥한화섬 축구단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참고[편집]

  1. 때문에 본 문서에서도 이하 흥한화섬이라 한다.
  2. 애초에 박정희 정권이 제1차경제개발5개년에서 잡은 한국섬유산업 전체 목표치는 '일 생산량 10톤이 가능한 공장 2개 설립'이었다. 그런데 특유의 쇼맨십과 통큰 계획으로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었던 박흥식 씨는 박정희 정권에 '일 생산량 15톤 공장을 만들어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이를 재가받은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홀로 한국섬유산업 전체를 거머쥐겠다는 무리수적 발상으로 일을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목표치도 터무니없이 높게 잡았던 것이다.
  3. 이 때 자본금을 마련하기 위해 박흥식 씨는 자신이 갖고있었던 신신백화점(오늘의 SC제일은행 종로영업부) 주변 땅 1천평을 헐값에 석유공사에 매각한다. 이 때 당시에도 6억원 정도 밑지고 팔았다고 말이 많았는데.. 오늘날의 부동산 가치를 계산해보면 조(兆) 단위로 손해를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4. 박흥식 회장은 자기 돈으로 장사한다는 마인드가 강했기 때문에, 주식회사 설립을 통한 자본 조달보다 개인 재산으로 회사를 운영하는걸 선호하였다. 때문에 화신그룹의 영화와 과오, 모든 부담은 박흥식 회장 개인에게로 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