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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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덕(河敬德,1897년 6월 26일 ~ 1951년 4월)은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사회학자, 언론인이자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조선축구협회 5.6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약력[편집]

전북 익산 출신으로 전북 신흥학교, 평양 숭실중학, 미국 하버드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당시로써는 보기드문 미국 유학파였던데다, 하버드대학교 정규 과정을 모두 수료한 인재였던지라 귀국 후 곧바로 연희전문 교수로 부임하여 광복시까지 후학을 양성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총독부 관보로 전락해있었던 매일신보를 인수하여, 서울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이외에도 미군정청의 도움을 받아 언론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축구협회장 활동[편집]

하경덕 회장은 중학생 시절 축구 선수로 활약했던바 있으며, 때문에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학자 출신임에도 축구에 대해 상당한 열의를 가지고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서울신문이 주최하는 전국도시대항축구대회를 개최하고, 전국대학축구선수권을 출범시키는등 다방면에서 한국 축구를 위해 공헌하였다. 특히 정부 수립 이전이었던 1948년 5월 21일 FIFA에 가입하고, 1948년 런던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 파견을 적극 추진한 것도 미군정청과 연줄이 있었던 하경덕 씨의 공헌이라는 평.


조선축구협회 회장 사임[편집]

1948년 7월,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선수 선발 논란을 이유로 임원진이 총사퇴하면서 하경덕 회장도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사망[편집]

6.25 전쟁 중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은신하였다가 인민군에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서울 수복 당시 탈출에 성공하였다. 탈출 후 미 국무성의 특별촉탁으로 임명되어 일본주재연합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하지만 투옥 당시 얻은 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사망하였으며, 장례식은 1951년 4월 20일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