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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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全朝鮮蹴球選手權大會
국가 일제강점기 조선
설립 연도 1935년
리그 폐지 1940년
최다 우승 보성전문 (3회 우승)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全朝鮮蹴球選手權大會)는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축구협회의 주최로 열렸던 일제강점기 국내축구대회이다. 주로 4~5월경 열렸던바, 매년 10~11월에 열렸던 전조선축구대회와 함께 일제강점기 국내에 존재하는 양대 축구 대회로 자리매김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일본축구협회가 주최하는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 (현, 덴노배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의 조선 예선으로 기능하였다는 점, 아래에도 서술하였듯 일장기 계양과 궁성요배 등 민족말살정책과 연계된 의례가 진행된 점 등의 이유로 조선신궁대회와 마찬가지로 대한축구협회에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개요[편집]

1933년 조선축구협회가 창립된 이후에도 최고 권위 대회인 전조선축구대회는 계속해서 조선체육회의 주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조선축구협회는 전만주축구단, 동경유학생, 영ㆍ불함대축구팀 등 과의 교류전 정도만 주최하는 형편으로 전조선의 축구계를 대표한다는 위상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축구 종목이 재차 채택됨에 따라 당시 대일본축구협회(현 일본축구협회)는 일본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의 올림픽 본선 출전에 대한 강화책으로, 올림픽대표선발 의미도 다소 포함된 제1회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1]메이지신궁경기대회와 분리하여 개최하였으며, 해당 대회의 조선예선으로써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를 요구했다.[2] 이에 조선축구협회가 해당 대회를 전담하면서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는 1935년 초대 대회를 시작으로 1940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1회 (1935년)[편집]

파일:1935년전조선축구선수권.jpg
1회 대회 결승전 모습. 우측에서 볼을 펀칭하려는 경성축구단이혜봉 골키퍼를 향해 평양축구단강기순 선수가 달려들고 있다.[3]

1935년 5월 14일부터 15일까지 양일간 경성운동장에서 조선축구협회 주최, 조선중앙일보 후원?으로 열렸다. 관람료는 성인 30전, 학생 20전. 평양에서는 평양축구단고려축구단이, 경성에서는 서울축구단, 경성축구단 총 4팀이 출전 신청을 하였으나 고려축구단과 서울축구단이 기권하여, 평양축구단과 경성축구단의 경평전으로 우승팀을 가리게 되었다. 결과는 후반 20분 경축 채금석의 어시스트를 받은 배종호가 골을 기록하며 1:0 으로 경성축구단이 우승했다. 여담으로 이 때 대회에 참가한 경성축구단과 평양 축구단 멤버를 기반으로 조선축구협회는 조선축구대표팀을 결성하게 된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축구대표팀 문서를 참고.


경성축구단 1–0 평양축구단
배종호


2회 (1936년)[편집]

1936년 2회 대회는 이전까지 봄에 열리던 오사카아사히신문 경성지국 주최 전조선축구대회와 합병하여 5월 7일부터 9일까지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참가 자격을 조선축구협회 가맹팀으로 제한하였으로, 대회에 참가하고자 하는 팀은 조선축구협회 가맹신청서 및 회비 10원을 납부해야만 했다. 총 4팀이 참가한 당해 대회는 보성전문의 우승으로 끝났으며, 보성전문은 1936년 6월 일본에서 개최된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제16회 덴노배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출전 자격을 받아 일본 원정길에 나설 수 있었다.[4]


  Semifinals Finals
             
 연희전문 6
 철도국 축구단 0
 보성전문 1
 연희전문 0
 의전 2
 보성전문 7


3회 (1937년)[편집]

전보성축구단이 우승하여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였다.


4회 (1938년)[편집]

1938년 대회는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의 조선중앙예선전으로써 기능하였다. 해당 대회에서 전연전축구단전보성축구단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전연전축구단은 조선관서지부의 추천으로 올라온 진남포 일광팀과 대전하여 전일본축구선수권 진출팀을 가리기로 되어있었으나 일광팀이 기권을 선언, 결국 전연전팀이 일본 원정길에 나서게 된다.


5회 (1939년)[편집]

1939년 대회는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조선예선으로 치러졌으며, 직전 대회와 달리 경기/함북/함남 3개 지역 대표가 출전하며 전국대회로써의 구색을 갖추었다. 경기 대표는 경성써커를 9대0으로 꺽은 전보성군이 출전했으며, 함북 대표는 청진군, 함남 대표로는 함흥군이 출전하였으며, 전보성군이 준결승전에서 청진축구단을, 결승전에서는 함흥축구단을 꺾어 우승을 차지하였다. 다만 당해 대회부터는 경기에 들어가기전 일본기 계양, 일본 국가 제창, 궁성요배, 황국신민서 제창등 의례가 추가되어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대회로 전락하였다는 흑역사가 있다.


6회 (1940년)[편집]

1940년 대회는 전연전군이 함흥축구단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본선에는 전연전군, 전보전군 2팀이 출전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1. 해당 대회는 제15회 덴노배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이기도 하였다.
  2. 축구계의 혁신을 위하야 최강팀을 편성하자! 상 -1935-04-01,동아일보-,
    축구계의 혁신을 위하야 최강팀을 편성하자! 하 -1935-04-01,동아일보-
  3. 자세히 보면 공을 노리는게 아니라, 이혜봉 GK의 무릎을 노리고 발이 들어가고 있다(…) 당시에는 흔한(?) 풍경이었다고. 특히 경평전은 라이벌 의식 때문에 저런 플레이가 빈번하게 벌어졌다고 한다.
  4. 이렇게 일본원정을 떠난 보성전문은, 1936년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을 따내며 개가하게 된다. 1936년 조선축구대표팀의 동대회 우승 이후로도 조선축구팀들의 호성적이 이어졌던셈.